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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꽃 피우는 평화의 섬 제주

4·3길

4·3길을 걷다

제주 4·3길은 4·3당시 사람들의 두려움의 기억과 생존을 위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입니다.

화해와 상생으로 4·3을 해결해 온 제주인의 노력을 알리고자, 제주4·3길에서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와 4·3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제주 4.3길 지도

4·3 평화기행 추천코스

제주시 동부권
관덕정 화북 곤을동 4·3 평화공원 선흘 목시물굴 낙선동성터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과 애기무덤 다랑쉬굴과 다랑쉬 마을
제주시 서부권
정뜨르비행장 하귀 영모원 빌레못굴 진아영 할머니 삶터 만벵듸 공동장지
서귀포시 서부권
동광 잃어버린 마을과 헛묘 동광 큰넓궤 대정 백조일손지묘 알뜨르 섯알오름
서귀포시 동부권
4·3평화공원 남원 현의합장묘 의귀리 송령이골 표선 백사장 성산읍 터진목 및 4·3 위령공원

제주안덕 동광마을

동광리는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국영여관인 이왕원이 있었을 만큼 사통팔달한 곳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공출로 불만이 컸던 마을은 관리를 폭행하는 ‘공출반대 사건’으로 인해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4·3당시 많은 주민들이 끌려가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당했다.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 가거나 겹겹이 쌓여 있어서 시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동광리는 4·3으로 인한 희생 자가 160여 명 이상이다.

동광마을지도

임문숙일가 헛묘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큰넓궤에 숨어있던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발각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주민들은 제대로 숨지 못했고 대다수가 붙잡혀 정방폭포 위에서 학살당했다. 시신이 겹겹이 쌓여 썩어있거나 바다에 떠내려가 찾을 수 없었던 희생자 9명을 헛묘 7기로 혼백만 모셔 원혼을 위로했다. 2명은 합묘다.

무등이왓마을

동광리 5개 부락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서 130여 호가 있었다.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서 말총을 쉽게 구할 수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릉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였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와 잠복학살터 등이 있는데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지금은 사라진 초가집 울담따라 아직도 대나무가 많아 오순도순 살았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무등이왓마을 최초학살터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이 동광리에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 10여 명을 호명하여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했는데 덜 맞아 육신이 온전했던 사람은 도망을 쳤고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광신사숙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개량서당인 광신사숙이 있던 자리다. 학생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배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이후 동광간이 학교로 개편되어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으로 김봉춘, 이두옥 씨가 있었다.

잠복학살터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는 자신들이 전날 학살한 양민들을 일가에서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전술훈련을 하듯 잠복해 있었다. 토벌대는 김두백 등 일가족 10여 명을 한곳으로 몰이하여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울부짖는 고통 속에 화염에 휩싸여 죽어간 이들은 대다수 여성, 노인, 아이였다.

말방에터(연자방아)

말방에가 있었던 자리다. 사람들은 옛부터 말방에의 수효로 마을 규모를 짐작했다. 무등이왓에는 층 다섯 개의 말방에가 있었을 만큼 마을이 컸다. 남아있던 말방에 1기는 동광분교 근처로 옮겨갔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살육하기 전날까지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이곳으로 나와서 서로 감저(고구마) 범벅을 나누어 먹으며 곡식을 갈 차례를 기다렸다.

동광분교

1948년 말경 토벌대에 의해 학교가 불타고 나서 이듬해 1월에 폐교됐다. 이후 동광교는 1949년 3월 안덕 초등학교에 흡수되었다. 4·3당시 학급 수는 1개 학년 1학급씩 (30명) 4학년까지 4개 학급으로 총 12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1교실에 2개 학년씩 복식 수업을 했으며 3명의 교사와 1명의 급사가 있었다. 소실 전 학교 규모는 3,500평 부지에 목조기와, 관사, 화장실, 물탱크, 운동장 및 1,500평 정도의 살습지 등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 물탱크는 한동안 군인들이 매복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삼밧구석마을

과거 주민들이 옷감, 밧줄 등을 만들기 위해 삼을 재배했다 하여 마전동으로 불리웠다. 4·3당시 임씨 집성촌으로 46가구가 살았는데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들은 살육을 피해 자연 은신처를 찾아 큰넓궤 등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토벌대에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혀 이듬해 1월에 정방폭포 인근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현재 집터와 올레,우영팟이 남아 그 흔적을 엿볼 수가 있고 후손들은 그 자리에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도엣궤

큰넓궤와 더불어 4·3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굴 내부는 30여 미터로 원래 큰넓궤와 이어져 있었다. 동굴 바닥에는 주민들이 가지고 갔던 생활용구 파편들이 널려있어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영화 ‘지슬’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임씨올레

임씨네 다섯 가구가 살았다. 토벌대가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삼촌,조카 밭에서 서로 능사일을 도와 수늘음을 했고 밤에는 식께(제사)를 지내며 조상에게 술을 올려 후손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올레 입구에 살던 임문숙씨 가족 5명을 비롯하여 총 14명이 희생당했다. 무명저고리를 입은 아이 웃음소리 따라강생이 (강아지) 짓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제주남원 의귀마을

4·3당시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한 순간에 삶터를 잃고 인근 오름, 숲, 궤등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 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남원마을 지도 민오름 주둔소 가는길

의귀초등학교

의귀초등학교는 1941년 남원공립 국민학교 병설 의귀간이학교로 개 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3사 건 당시 의귀초등학교는 의귀리·수 망리·한남리·신흥리 4개 마을의 어 린이들이 함께 다녔던 학구공동체 였다. 학교는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2월 15일 폐교되었고 그 직후인 12월 26일부터 육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하 였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가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군 인 4명과 무장대 51명이 사망하였다. 이 습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여명의 주민들을 학교 동녘 밭에서 학살해버렸다. 이 때 희생자들은 현재 “현의 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학교는 4·3사건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49년 8월 1일 남원초등학교 의귀분교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4·3사건으로 인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학생들은 2003년 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 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명이 집단학살 당 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 되었던 시신들이 ‘현의합장묘 옛터’에 매장(埋 藏)되었다가 2003년 9월 20일 마지막으로 안 장(安葬)된 곳이다. 유족들은 1964년 ‘삼묘동 친회’를 조직하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 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봉행했다. 1983년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를 담아 ‘현의합장묘’ 묘비를 세웠으며, 유족회의 명칭도 ‘현 의합장묘 4·3유족회’로 변경하였다. 2003년 이후 해마다 음력 8월 24일에 이곳에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송령이 골

이곳은 4·3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 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1949년 1 월 12일 새벽, 무장대는 의귀초등학교 주둔 부대를 공격했으나 2시간여의 전투에서 51 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때 사망한 무장대 시신은 초등학교 뒤편에 흙만 대충 덮 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그해 봄 토벌대의 지시 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매장(埋藏)되었다. 일부 시신은 가족이 찾아간 경우도 있으나 다수의 시신은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埋藏)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4·3연구소’, ‘현의합장묘 4·3유족회’등이 ‘생명의 존엄’과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담아 천도제를 지냈고 그 후 시민사회단체 등이 매년 8월 15일에 벌초를 하고 있다.

민오름 공동목장

이곳 민오름 주변은 의귀마을 공동목장으로, 4·3사건 당시 토벌대가 무장대 토벌을 목적 으로 “영궤루주둔소”를 설치하여 전방 초 소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또한 소와 말을 치던 테우리들과 4·3사건 당시 토벌대 가 이용했던 “이멩이 물”이 아직도 솟아나고 있고, 현재는 근처에 “옷귀마(馬)테마타운”이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쉼터(의귀천)

의귀천은 서중천에 비해 경사가 높아 크고 작은 소(沼)와 궤가 많다. 궤는 4·3사건 당시 주민들이 피신처로 이용하였다. ‘소’를 중심 으로 활엽수림 지대가 잘 발달해 다양한 동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의귀천은 곳곳에 물 이 많아 사람이 먹는 물, 소와 말이 먹는 물, 농사에 사용하는 물 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 기도 하는 등 오래 전부터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오름주둔소(궤루주둔소)

민오름주둔소는 1952년 100전투경찰사령 부 1개 소대가 주둔하여, 남아 있는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곳이다.

영궤

4·3사건 당시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을 피해 의귀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던 곳이다. 궤 입구 가 넓어 토벌대에 발각되기 쉬웠기 때문에 오 래 머물지 못했다는 당시 주민의 증언이 있 다. 영궤는 오랫동안 피신처로 이용되지 못했 지만 임시로 비를 비하고 추위를 막기에는 충 분하였다.

제주조천 북촌마을

북촌은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포구를 중심으로 ‘본동’, 서쪽에 서우봉과 접한 ‘해동’, 남쪽 선흘리 방향 중산간에 ‘억수동’ 이 있으며, 1990년대에 ‘한사동’이 새로 조성되어 지금은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북촌마을 지도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에 들어온 토벌대가 마을 주민 300여명을 대학살한 장소로 2009년 위령 제단과 북촌4·3기념관 및 위령탑이 설치되었으며 북촌리 사건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현기영의 소설‘순이삼촌’의 문학비도 여기에 세워져 있다.

서우봉 일제 진지동굴과 몬주기알(4·3희생터)

서우봉은 서산봉(서모)으로도 불리며,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리 서쪽은 함덕리이다. 북촌에 속한 오름 동쪽 면적이 서우봉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 진지동굴(등록문화재 제309호) 서우봉 해안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20여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진지동굴은 입구가 3개인데 내부가 연결된 ‘ㅌ’자형으로 마을사람들은 ‘삼형제굴’이라고도 한다. 18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진입로가 있으며, 진입로에서 30m정도 들어가면 진지동굴들을 볼 수 있다.

■ 몬주기알 서우봉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을 말한다. 절벽 아래에는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비교적 넓은 천연동굴이 있어, 4·3당시 북촌주민들 뿐만 아니라 함덕주민들도 숨었던 장소이다. 썰물일 때 해안가로 접근이 가능하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1948년 12월 26일경 4~5명의 여성들이 절벽 위에서 총살당하는 등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북촌포구(4·3역사현장)

1948년 6월 16일 우도에서 출발하여 제주읍으로 향하던 한 척의 배가 갑자기 몰아친 풍랑 때문에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순경을 포함한 가족 13명이 동승하고 있었다. 당시 지서장은 북촌포구에 들어서면서 고기떼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이 총소리를 듣고 접근한 무장대에 의해 경찰 2명이 희생되었다.

낸시빌레(4·3학살현장)

이곳은 1948년 12월 16일 북촌마을 청년 24명이 당시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다. 1948년 12월 경, 마을주민들은 토벌대로부터 ‘자수하면 살려준다. 무장대에 협조를 했던 안했던 군부대에 자수하면 양민으로 살게 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믿고, 마을 주변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과 민보단에 들어가 토벌대에 협력하던 주민들 40여명이 함덕의 대대본부로 갔다. 그런데 그 중 24명이 북촌리와 동복리 경계에 있는 낸시빌레에서 총살당하였던 것이다. 이유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불참했다는 것이었다. 낸시는 냉이의 제주어로, 낸시빌레는 냉이가 많이 나는 곳을 말한다.

꿩동산(4·3역사현장)

1949년 2월 4일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3대대 11중대는 군 트럭 2대에 군인 20여명을 태우고 일본99식 총 150정을 수송하기 위해 함덕 대대본부로 향했다. 군 트럭이 이곳 꿩동산에 이르자 매복해 있던 무장대가 습격하였다. 이 습격으로 군인 15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경찰 1명과 주민 1명도 죽었다. 무기도 모두 무장대에 탈취당하였다. 무장대는 1명이 죽었다. 당시 이곳은 가파른 동산에 소나무가 가득했으나 20여 년 전 일주도로 확장공사로 천연자연림이 많이 훼손되어 당시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서쪽의 너븐숭이와 함께 북촌마을의 상징적 4·3역사현장이다.

마당궤(4·3은신처)

이곳은 4·3 당시 북촌마을 주민들이 숨었던 은신처이다. 북촌포구 경찰관 피습사건으로 토벌대의 수색이 강화된 1948년 6월 22일, 이곳 ‘마당궤’에 숨어있던 북촌마을 청년 9명이 발각되어 제주경찰서에 연행된 곳이다. 이들은 이후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 그날 수색은 경찰과 미군이 같이 참여했는데 미군(4명)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당팟(4·3희생터)

1949년 1월 17일 북촌학살 때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북촌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이곳 ‘당팟’으로 끌려왔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이곳으로 끌고 오자마자 곧바로 총살했다. 당시 북촌학살은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로 나누어 이루어졌고 이곳 ‘당팟’에서는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정지퐁낭 기념비

이 곳은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어 조선시대 때 관리들이 쉬었다 가는 장소였다. 정지퐁낭은 수령 약 800년 된 팽나무로 마을의 정자 역할을 하였으나 1958년 9월 태풍 ‘사라’호에 의해 한쪽으로 쓰러지자 제거하고 다시 심었다. 이 나무 옆에 있는 제주목사 선정비에는 4·3사건 당시 총탄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다.

제주표선 가시마을

1948년 4·3당시에는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이와중에 산으로 도피했다가 붙잡히거나 도피자가족으로 선별된 사람들은 표선리 '한모살'과 '버들못'에서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가시마을 지도

고야동산

고야동산은 4.3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빗개)를 서던 장소이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졌고 3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고야동산 부근에서도 희생된 사람도 있다.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동산의 형태는 남아있다.

한씨방묘

600년 전 가시마을을 설촌한 이는 청주한씨 한천과 그 아들의 묘이다. 1392년, 한천이 제주에 들어오고 가시리에 정착하는데 대제학을 지낸 학자라는 것이 알려져 이웃마을 등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가시리를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됐다. 한씨방묘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 되어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었다.

구석물당

구석물당은 북쪽에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제단이 있고, 제단 앞쪽으로는 50여 평 정도의 마당을 동백나무, 팽나무, 보리수 등의 나무와 돌담이 둘러싸고 있어 오소록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구석물당은 신목, 신석형 당으로서 주위의 나무나 암석은 물론, 이 주위의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것으로 여겨 무엇이든지 건드리지 못하도록 절대 금기한다. 구석물당의 제일은 음력 정월 그뭄날이며, 이 날은 온 아을의 부녀자들이 정성들여 차린 제물을 지고 가는데 제일 3일 전부터는 육식을 금기하는 등 일체의 부정한 것을 가려 당제에 임하게 된다. 당의 제일은 정월 그몸, 6월 7일과 8일, 11월 7일과 8일이고, 당에 갈 때는 제물과 지전물색을 가지고 가며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면암최익현선생유적비

제주도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은 고려 말 공양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 공양왕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한천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2년 제주에 들어온 한천은 가시마을을 설촌했다. 1879년 제주로 유배를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었다. 당시 비문과 비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두릿동산

‘마두릿 동산’은 4·3당시 마을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고야동산에서 세워진 깃대를 내리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곳에서 그 신호를 보고 마을주민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다. 4·3당시에는 마두릿동산에서 고야동산이 보였지만 지금은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시 경찰을 ‘검은개’라 부르고 군인을 ‘노란개’라고 부르던 것을 보면 마을주민이 외부인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종서물

‘종서물’은 4.3사건으로 소실된 마을이다. 가시천 서쪽 일대에 10여호가 살던 마을이었으나 소개령에 의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후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현재 종서물은 과수원이나 농경지로 변해버려서 그때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새가름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마을이다. 한때 20여 가호에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기도 했던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인근 마을 등 주변으로 홑어졌다. 1949년 마을이 재건되면서 2가호가 다시 새가름으로 돌아왔으나 또 다시 마을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갑선이오름

산 모양이 미처 껍질을 벗지 못한 매미 굼뱅이처럼 생겼다하여 ‘갑선악’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적이 드문 까닭에 오름을 오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햇볕이 잘 들지 않을 만큼의 빽빽한 밀림이 자리 잡고 있다. 금우, 제비꽃, 금창초, 주름잎 등 다양한 야생초가 오름을 덮고 있다.

가시천

가시리에서 발원하여 세화리로 빠져가는 총 7.41km의 길이를 갖고 있는 하천이다. 가시천의 일부는 원시림에 둘러싸여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고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깔려있어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장소이다.

달래이모루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주민 12명이 희생된 곳이다. 이후 마을주민들은 소개하라는 명령에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거나 주변 산으로 피신 하거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제주한림 금악마을

금악리는 1550년경 진주강씨 일가가 동네의 북쪽에, 남양홍씨가 남쪽에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양씨, 박씨 그리고 김씨, 이씨, 송씨 등이 입주했다고 한다. 금악리는 4.3을 거치면서 300여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 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

금악마을 지도

하르방당

이곳의 지명은 당동산이다. 수렵(사냥, 목축) 신인 한라산 신이 호근이모루 정좌수의 딸과 결혼 후 인간세상인 금오름에 내려온 후 이곳에 좌정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 여덟, 손자 일흔여덟을 이웃 마을에 보내어 당신(堂神)으로 좌정토록 하였다는, 주요 민속 신화 지역이다. 하르방당을 오일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2지신 중 말의 날에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빈 데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오소록이 동네

“오소록하다”와 “검은매(소록이=매의 제주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 함께 전해지는 동네이다. 4·3이 나던 1948년 음력 5월 초하루 이곳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만이 빈 집터를 지키고 있다.

할망당

이곳의 지명은 따신머들이다. 농경신인 정좌수의 작은딸님 아기씨가 한라산신과 혼인을 한 후 금오름을 거쳐 좌정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손자 일흔여덟을 이웃 마을에 보내어 당신(堂神)으로 좌정 토록 하였다는, 주요 민속신화 지역이다. 할망당을 축일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2지신 중 소의 날에 이곳에서 소원을 빈 데서 유래했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웃동네

잃어버린 마을 비석이 세워진 이곳은 4백여 년 전에 설촌된 유서깊은 마을로 강씨, 김씨, 박씨, 이씨, 송씨, 홍씨 등 38호에 141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하고 우마를 키우며 정겹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1일경 소개령에 의해 마을은 전소 되어 폐촌이 됐고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 협재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와중에 무고한 주민 8명이 희생되었다. 그 후 금악리 재건명령에도 웃동네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지금은 당시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고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뛰놀던 팽나무와 월대 그리고 처참히 부서진 방에들만이 버려진 채 그 날의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금오름

금오름은 해발 427.5m, 분화구 바깥둘레 1,200m로 금악리의 중심에 있으며 금물악 (琴勿岳, 今勿岳)·거문오름(黑岳)·금악(今岳, 琴岳)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지금은 금오름 으로 불리고 있다. 암매라고 불리는 금오름 분화구의 서쪽능선 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한라산은 머리, 이달이 오름은 가슴, 금오름 남·북 봉우리는 무릎에 해당하는 여인의 형국이라고 한다.

진지동굴

제주도 서부지역 전체를 볼 수 있는 금오름은 지리적 요충지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다. 4·3때 주민들이 이곳에서 망을보다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 깃발을 흔들어 마을에 알리기도 하였다. 진지동굴을 피난처로 이용 하기도 했지만, 마을 재건 이후 2개를 남기고 메워버렸다. 4·3을 주제로한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포제단

마을제를 지내는 곳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 정일(丁日)을 택하여 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생이못 주변에 집을 짓고 일주일 전부터 제관들이 기거하며, 정성을 들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한 후 행하였다. 4·3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면서 중단되었으나 마을이 재건 되면서 다시 지내고 있다. 당이 주로 여성 들의 공간이라면 포제단은 남성들의 공간이다. 평소 포제단의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음력정월에는 마을제를 지내야하므로 평소처럼의 출입은 하지 않아야 한다.

벵듸못

넓은물 혹은 큰못이라는 의미로 한라산에 살던 멧돼지들이 내려와 땅을 헤쳐서 습지를 만들어 놀던 자리를 물통으로 만든 곳이라 한다. 목축이 성행하던 과거에는 저지, 봉성 등에서도 이 물을 소와 말에게 먹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밭에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기도 했고, 해가 지면 처녀, 총각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동가름

동가름은 동쪽에 위치한 동네라는 의미로 4·3 당시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소개령으로 지금은 대나무 들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이 주변부터 각생이내까지 남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새가름

새가름은 새로 생긴 동네라는 의미로 주로 동가름에 살던 양씨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처녀당에서 가족의 무사안녕을 빌며 새가름물과 각생이내를 식수원으로 사용하여 한 때는 30여 가구까지 살았다. 이곳 또한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만벵듸묘역

이곳 일대 지명이 만벵듸라서 묘역명칭을 만벵 듸묘역이라고 한다. 이곳에 안장된 영령들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8월 20일(음7월7일) 새벽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송악산 섯알오름 일본 군탄약고 터(현, 백조일손묘역)였던 곳에서 무참 히 학살된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유족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다 6년 만인 1956년 3월에야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당시 이 지역 희생자 수는 62명인데 이 묘역에는 46위가 안장되었다.

처녀당(아미당)

이곳은 하르방당과 할망당사이의 7남매 중 넷째 막내 딸로 태어난 처녀의 몸으로 좌정하여 당신 (堂神)이 되었다고 전해내려오는 주요 민속 신화 지역이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으므로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4·3당시 이 당에 숨어있다 경찰에 잡힌 무장대 간부가 당 건너편 밭에서 자신의 가지고 있던 큰칼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밭에 버려지고 머리만이 관덕정 마당 깃대에 걸렸다고 한다.

벵듸가름

벵듸가름은 향사와 학교 그리고 풍부한 물이 있어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동네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여 네그루의 나무를 모양으로 심었다. 4·3당시 이 나무 중 먹구슬나무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매달려 고문을 당했고 며칠 후 나무들은 베어져 버리고 향사와 학교마저 불에 타 사라진다. 지금의 월대 나무들은 마을을 재건한 후 심은 나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