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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꽃 피우는 평화의 섬 제주

언론보도

死·삶을 말한다 -한겨레21-

[2018-03-26] 작성자 최고관리자

[한겨레21] 큰넓궤부터 섯알오름, 북촌 너븐숭이까지 제주4·3 상흔 찾아 떠난 2박3일…
통곡의 섬에 삶과 죽음은 함께 있었다

낮은 포복으로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굴 입구를 지나면 어른 키만한 높이에 반경 4m 정도되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뒤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이곳에서 집단 은신했다.

형을 날려버렸다.

일정 때 일본으로 간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조천중학원에 다니던 큰형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다. 둘째 형은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만 있었다.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곤 큰형밖에 없었다. 그런 형이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난리 1년 전(1947년)에 있었던 3·1절 시위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었다. 1948년 3월6일, 큰형이 죽었다. 조천지서에서 고문받다 골로 가버렸다. 형의 이름은 김용철이었다.

2월28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에서 만난 김용선(78)씨는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다만 이장할 때 본 형의 백골은 아직도 선명하다. 두개골이 함몰돼 있었다.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4·3의 한 도화선이 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

4·3의 도화선이 되기도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형을 잃은 김용선씨.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 제주 사회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金用哲,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3월14일 모슬포지서에서 유치 중이던 양은하(梁銀河, 27세) 역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3월 말에는 서청 경찰대에 붙잡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朴行九,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 상태에서 끌려가다가 총살당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지역신문에도 실렸을 정도로 민심을 들끓게 했다. 경찰은 지병에 의한 사망이라고 해명했지만 주검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가 거세졌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 당국에 요구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경찰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치러진 1차 부검이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고,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 사인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이 구속됐다.

장례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수백 개의 만장이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 한 달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제주 청년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도피입산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면서 도민들은 경찰을 더욱 불신하게 됐다”고 향토지는 적었다.

김씨는 “큰성(형)이 죽지 않았으면 집안이 멸족됐을 거”라며 “형이 죽어서인지 4·3 그 난리통에도 다른 화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집안은 항일운동가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천읍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도일한 김경희 선생은 그의 작은할아버지였다.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도 받았지만 후손인 김씨는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금 한 푼 받지 못했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방불명, 그리고 형의 죽음까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3월1일 오전, 날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은 모질게도 불었다. 제주를 찾은 인권활동가들의 당일치기 4·3 ‘다크투어’ 일정에 동행하기 위해 제주시 애월읍으로 향했다. 행사를 주관한 강은주 ‘제주 다크투어’ 공동대표는 일정을 소개하면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은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라며 “블랙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했다. 4·3 다크투어는 연중 계속된다.

첫 일정은 영화 <지슬>의 촬영지로 유명한 서귀포시 동광리 ‘큰넓궤’(‘큰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였다.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 은신했던 동굴이다. 지급받은 헬멧과 장갑을 착용하고 인권활동가 30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 너른 들판에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큰길가에서 큰넓궤까지 가는 길은 1.3km나 됐다.

큰넓궤 입구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자물쇠로 채워 있었다. 해설사를 따라 철제문 사이를 비집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암흑이 끼쳐왔다. 휴대전화 조명을 켜 진로를 확보했지만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폭이 좁아져 낮은 포복을 해야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무릎이 돌에 부딪혀 약간의 통증이 번져왔다. “아!” “악!” 어둠 저편에서 짧은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수시로 천장에 부딪히는 헬멧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는 몇 명은 진입을 포기했다. 2m 정도 기어가자 아래의 큰 동굴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가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어른 키만 한 높이에 반경 4m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윗굴이었다. 해설사는 이곳이 첫 번째 거주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축축했다. 불빛을 비춰보니 깨진 사기그릇과 질그릇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당시 피란민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70년의 풍화도 없이 깨끗했다. 천장 한쪽엔 박쥐가 매달려 있었다. 여기서 20m만 더 가면 또 아랫굴이 나온다고 했다. 폭은 다시 급격하게 좁아졌다.

“당시 피란민들은 이곳에서 밥을 해먹지는 않았어요. 근처의 작은 굴에서 며칠에 한 번씩 밥을 해서 차롱(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납작하게 만든 그릇)에 담아다 먹었다고 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 발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대요. 똥도 밖에서 누지 못해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 거기서 누었다네요.”

해설사의 말에 활동가들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공간에서 노인들은 어떻게 60여 일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밖으로 나오면서 영화 <지슬>의 동굴 장면을 떠올렸다. 50분 동안의 동굴 탐험을 마친 활동가들은 “생존자다”를 외치며 “온몸으로 4·3을 기억하게 됐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슬픔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2004년 9월 별세한 진아영 할머니의 유품들. 이면지에 ‘쥐약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오승훈 기자

버스는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으로 방향을 틀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을 불법적으로 체포·구금한 뒤 집단학살했다. 섯알오름에선 1950년 8월20일 새벽 2시에 한림어업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 새벽 5시께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보도연맹은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이승만 정부가 강제로 조직한 어용단체였다. 지역별로 할당이 정해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보리 서 말을 받고 가입하는 등 엉망이었다. 1949년 중반 이후 가입한 이는 대개 무지렁이 농민들이었다. 현기영 선생 말처럼 “이승만이 국부라면 지 새끼들을 잡아먹은” 국부였다.

해설사는 희생자 추모비를 둘러보고 야외에서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자고 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맨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데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에 모래가 밥과 반찬 위에 앉았다. ‘정말 다크투어가 맞다’는 얘기가 절로 나오는 날씨였다. 서둘러 점심을 쓸어넣은 우리는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송악산 일본군 진지동굴에 도착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뚫려 있다. 너비 3∼4m, 길이 20여m에 이르는 이 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이다. 4·3 이전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였던 제주의 상처는 오늘날 강정 해군기지로 이어지고 있다.

다크투어 마지막 일정은 ‘진아영 할머니 삶터’(서귀포시 한림읍 월령리)였다. 진아영 할머니는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2004년 9월 별세했다.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할머니의 집은 방 한 칸에 부엌으로 단출했다. 방 한쪽에 머리빗부터 자물쇠, 목걸이, 머리띠, 공과금 영수증, 동전 등 할머니가 쓰던 유품이 진열돼 있었다. 몽당연필 옆 이면지에는 ‘쥐약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 나왔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할머니의 슬픔이 거기 새겨 있었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었나. 인권활동가 몇몇이 눈시울을 붉혔다. 돌아오는 차편, 하루 종일 바람을 맞아서일까. 으스스 신열이 났다.

3월2일 오전, 상경하는 날 야속하게도 날씨가 맑게 개었다.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참배객은 거의 없었다. 도열한 각명비 뒤로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적막하고도 평화로웠다. 아치형으로 된 4·3위령제단으로 들어갔다. 1만3903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자랑이고 기쁨이었을 1만390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는 이름을 얻기도 전에 죽은 아기도 많았다. 만약 그들이 살았다면 올해 일흔이 됐을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지금 내 나이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그렇다면 여긴 한 사람이 1만3903번 죽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4·3 70주년 추념식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평화공원이 중산간이 아닌 시민들 일상 곁으로 내려올 수는 없었을까. 삶과 죽음은 함께할 수 없는 것인가.

제주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조천읍 북촌리 집단학살 현장으로 차를 돌렸다. 1949년 1월17일, 북촌리 주민 450여 명이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됐다. 무장대가 토벌대를 습격한 데 따른 무차별 보복이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는 ‘死·삶을 말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단일 규모로는 제주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천읍 북촌리 학살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고완순 북촌 노인회장.

기념관 앞에는 그때 죽은 아기들을 묻은 애기무덤이 있다. 어른들 무덤은 다른 곳에 안장됐지만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무덤가에 핀 수선화가 햇볕에 반짝였다. 돌과 돌 사이에 미니자동차, 막대사탕, 과자가 놓여 있었다. 고무로 된 노란 오리인형도 보였다. 말 없는 통곡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은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떼죽음을 당했다.

북촌리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고완순(80) 북촌 노인회장의 댁을 찾았다. 마을 공터에서 기다리는데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큰일을 당하셨는데도 연세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그때 내가 11살이었거든. 70년이 지났는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지. 바깥채에 있던 애가 울더라고. 군인이 단검을 꽂은 총으로 문을 열어젖혔어. 빨리 초등학교로 모이라 하더라고. 나가서 보니까 군인들이 불을 질러서 옆집이 불타고 있더라. 3살 먹은 남동생이랑 언니랑 나도 손 하나씩 잡고 운동장으로 갔어. 사람들이 운동장에 반 이상 가득 찼어. 내가 호기심이 굉장히 많거든. 교통사고 나도 다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데. 학교 울타리 위에 기관총이 운동장으로 향해 있더라고. 사람들 끄트머리로 끼어 앉았어. 교단에 군인이 올라가서 뭐라고 말하더니 바로 총을 쏘는 거야. 아침에 군인차 지나가는 거를 (무장대가) 죽여가지고 군인 2명이 죽었거든. 마을 사람들이 그 주검을 가지고 부대에 갔더니 한 명 빼고 다 죽였거든. 그러더니 기관총 사격으로 막 쏘는 거야. 막 기었어. 손에 걸려서 보니까 내 손이 피범벅인 거야. 아고 어멍 손에 피 묻었엉. (눈물을 글썽이며)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세상에.”

군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30명가량씩 묶어서 학교 옆 옴팡밭(오목하게 들어간 밭)으로 끌고 갔다. 그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옴팡밭에 끌려갔는데 길도 좁고 밭이 깊어. 끌려가보니까 이미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다리에 머리가 가 있고. 죽어 있었어. 쓰레기, 바람에 불려온 것처럼. 우리를 횡대로 앉혔어. 죽음 앞에는 뭔 생각이 안 나. 그때 시간이 겨울인데 오후 4시가 넘었어. 밭이 피로 물들어서 햇빛을 받아 흑색으로 보였어. 자기네끼리 이북 말씨로 뭐라뭐라 하더라고. 쇠소리가 철거덕 철거덕 나. 벌벌 떨고 있는데 사격 중지하는 소리가 들렸어. 지프차가 달려오는 거야.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으로 다시 끌려갔어.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함덕으로 와라’고 하더라고. 집이 불탄 사람들은 남의 집 곳간이나 외양간에서 밤을 지새웠지. 생각해보면 그때 아예 제주도를 없애버리려고 그런 거 같아.” 소설 <순이삼촌>에 나오는 그 옴팡밭이었다.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 되”었다는 그 밭. 옴팡밭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 삶과 죽음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

죽은 사람 썩어 ‘감저’ 농사 잘된 옴팡밭

조금만 더 일찍 옴팡밭에 끌려갔으면 자신도 분명 죽었을 거라는 그는, 강원도로 시집간 언니를 만나러 속초에 갔다가 월남해 군에 투신한 남편을 만나 혼인했다. 부산대학교를 나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큰딸은 몇 년째 연락이 없다. “이거 한 가지는 소원이야. 뭐냐면 4·3 겪은 사람들이 동네에서 35명쯤 돼. 내가 막내야.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 오늘도 둘째 딸이 시내에서 감자탕 사다 갖다 줬어. 다 독거노인이야. 언제 죽을지 몰라. 남편 잃어버리고 자식 잃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망이가 많아. 그런 노인들을 위해 공동생활할 수 있는 양로원이나 지어줬으면 좋겠어. 그동안 고통을 준 대가로 국가가 이런 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제주·서귀포=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